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는 금년(2001)겨울, 창 밖에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10년 전 모두가 잠든 고요한 새벽 동틀 녘.
차창으로 몰려드는 눈발을 헤치며 벌판을 달려가던 기억 속으로 빠져든다.
10년 전과 지금은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
우리들의 식생활의 변화는 물론 정보통신과 문명의 이기들의 발달이 급속도로 이루어져, 쫓아가기도 바쁠 정도이니, 컴퓨터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45세(?) 이상-에게는 참으로 적응하기도 어려운 첨단 과학시대를 맞고 있다.
설계사무소의 경우를 보면,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제도판과 삼각자가 설계사무소의 필수품이었고, 컴퓨터가 비로소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에게 완전 밀려나 제도판은 찾아보기조차 힘들게 되었고, 컴퓨터 없는 설계사무소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10년 전 컴퓨터로 척척 그려낸 도면을 처음 구경했을 때, 컴퓨터가 그리도 신기하고 편리하게 느껴지던 적이 있었으나, 요즘은 그다지 예뻐 보이지만도 않는 애물단지로 느껴지기도 하니 아이러니컬하기 짝이 없다.
손으로 그리기 어려운 곡선작업들이 손쉽게 되었고, 디테일이나 표준도면 등의 불필요한 이중작업이 생략됨과 동시에 그 정확성과 깨끗한 도면작성 등, 컴퓨터 사용에 따른 장점들은 굳이 나열할 필요도 없으리라. 허나 건축설계 디자인에서는 그 효용성과 더불어 또 다른 문제점을 갖고 있어 그다지 믿을만한 협력자가 되지 못하는 듯 하다.
단순 반복작업이 손쉽고 스케일의 조정에 따른 축소확대가 자유로운 컴퓨터에 의한 디자인이, 오히려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의 함정 속에 빠지게 할 우려와 함께 인간성의 황폐화를 가져올 것 같은 두려움마저 갖게 한다.
하루종일 컴퓨터 화면 속에서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들이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그리는 것일까 ? 부분적으로 클로즈업되어 있는 화면 위에 선을 그리고 공간을 설정하여 전체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면서 하는 계획이, 과연 제도판 위에서 전체를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오버랩하며 디자인할 수 있었던 예전에 비해 월등히 나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프린터와 플로터가 연신 굉음을 내며 부지런히 돌아가건만, 컴퓨터 앞에서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놀림들이 그다지 신명이 나 보이지 않는다. 똑같은 단순 반복작업을 계속할 때 오는 피로감 탓일까 ? 정보화 시대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인터넷과 첨단 통신수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들이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들에 종속되어 가고 있고, 스스로 인간성을 상실해 가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오늘도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 표현된 현란한 도면을 쳐다보며 그 속에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정리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부분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를 바라보자 ! 그리고 희망을 갖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 !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보다는 기대를 갖고 긍정적으로 살아보자고 다짐을 하건만, 그 안타까운 외침은 허공 속에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 올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계획단계에서는 적어도 손으로 그리자. 선하나 하나를 그릴 때마다 짜릿짜릿한 희열을 맛보고, 치수선 하나 하나에 마침표를 찍을 때마다 팽팽한 긴장감과 만족감을 느껴보자.
사라져 가는 인간성을 회복하자.
서울건축사신문"남대문"칼럼(2001.02) / 이 항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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