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오피스 빌딩들이 열병해 있는 듯한 테헤란로를 지나간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휑하니 넓게만 느껴지고, 지형지물이라고는 국기원과 반도 유스호스텔이 고작
이던 그 거리가, 이제는 빌딩 숲과 늘어만 가는 차량들의 행렬로 인해 넓기는커녕, 러쉬아워나
백화점의 바겐세일이라도 있는 날이면 그저 짜증나는 거리로 변해 버렸다.
테헤란로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빌딩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외장재료의
고급화 그리고 건축경기의 부침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매년 연중행사처럼 플라타너스 가로수의
가지들이 무참히 잘려나간 모습이나, 날로 대형화된 약국의 간판글씨와 건물 상층부에 붙어있던
금융기관의 광고글자의 흉터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더욱 볼썽사나운 것은 "미술장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된 조형물이다.
도시주변환경에 어울리고 건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조형물이 진정 좋은 미술장식품일텐데, 도대체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서는 안될 것 같은 조각품들이 그 비싼 땅을 점유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이며, 공사비의 일정액 이상의 작품을 설치하도록 한 건축법규의 강제성이 과연 필요한 것인지 의구심이 든다.
칠팔년 전 무역센터 앞 삼성역 부근에 오피스빌딩을 설계할 때의 경험이다. 지금은 콧수염 밖에
생각이 나지 않지만, 실험정신이 왕성했던 젊은 조각가와 실랑이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건축주의 의사에 따라 선정된 조각가로서 건축을 비교적 잘 이해하는 조각가라고 생각되어, 특별한 주문이나 간섭을 하지 않았었는데 그 결과를 보고는 그만 아연실색을 하게 됐다.
설계당시 건축주의 배려에 따라, 건물 측면 썬큰가든의 벽면을 건축적으로 처리된 조각으로 형상화하고, 후면도로의 환기통을 적극적으로 디자인하여 조형화한 것 까지는 비교적 만족스러웠으나,
전면 주출입구 부분의 좁은 조각대 위에 건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경한 철제조형물이 세워져 당초의 좋은 조형물에 대한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바람개비 형상인 두 개의 날개가 돌아가는 기발한 착상에 도취되었던 조각가는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설계자의 지적을 아랑곳하지 않고 "작가의 의도는 존중되어야 한다"며 건축주와 설계자의 설득을 거부했다. 노란색을 즐겨 사용하던 조각가에게 색채만이라도 건물과 조화가 되도록 녹색으로 변경해 줄 것을 수차례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조각이 건물보다 두드러져야 한다"는 궤변으로 항변하며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지나가는 이들의 부정적인 관심만 끄는 작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는데, 설계자로서는 조형물이 놓여지는 조각대를 주변 기단에 맞추어 디자인 해주는 정도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도시미관을 해치는 조형물이 과연 "미술장식품"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건축법규의 비호아래 존재하여야 할까? 도시환경과는 상관없이 작가의 의도만을 고집하며, 건축가와의 대화 조차 거부하는
조각가의 작가정신은 과연 무엇이며 보호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매봉산 언덕에 올라 도시의 굉음과 산새들의 지저귐을 함께 들으며, 어서 빨리 정말 보고 싶고 찾고 싶은 좋은 환경 조형물과 쉼터들이 도시 곳곳에 생겨 나기를 기대해 본다.
서울건축사신문 "남대문"칼럼 (2000.12) / 이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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