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2월 초순, 발끝까지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
김포공항에서 서울발 러시아행 소련 비행기를 탔다. 탑승객은 러시아를 왕래하는 한인들과 유난히 이목구비가 뚜렷한 러시아인이 대부분이다.
코끝을 찌르는 러시아인 특유의 체취와 매캐한 담배연기가 자욱한 기내환경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도 없이, 북한상공을 지나 백설로 뒤덮힌 험산준령을 내려다 보며 구름위를 떠가는 신선(?)이 된다.
두시간 남짓 만에 만주벌판을 지나 중국과 러시아 국경인 아무르강 근처 하바로브스크에 당도했다.
공산주의였던 나라에 대한 경계심 탓인지, 공항에서 서성이는 러시아 군인들을 보니 왠지 섬찟한
생각이 들었다. 방한모를 눌러쓰고 마중나온 교포를 따라 하룻밤 묵기로 한 정선생댁으로 향했다.
공산주의였던 소련이 망한 후, 빈곤의 늪에서 헤매는 그들. 어제도 택시 운전사가 강도로 돌변하여 교외에서 사람을 죽였단다. 그즈음 호텔은 위험하기도 했고, 그곳 교포들을 돕기도 할 겸, 소개받은 교포 집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당시 고르바초프가 연구소 소장으로 받은 봉급이 월 18만원이었고,
근로자 월급이 12만원 정도였으니, 교포 집에서 1박2식에 100달러 정도 주었다면, 그들에겐 분명
횡재였으리라.
10층 규모의 아파트들이 판에 박은 듯 무표정한 표정으로 열병해 있다. 헛간문을 연상시키는 널판문으로 된 아파트 출입문을 열고, 영화에서나 본 듯한 쇠창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현관 앞에
설치된 살벌한 방범용 철창 너머로 초인종을 누른다.
"띵똥" 초인종 소리에 여관(?)집 안주인이 능숙한 솜씨로 손님을 맞는다. 바깥주인은 시베리아에
벌목공으로 가 있고, 고교생인 아들은 교내 체스왕이란다. "그 놈의 고르바초프인지 뭔지하는 놈
때문에 소련이 망했고, 옐친 그 놈도 수상한 놈"이라는 교포 아줌마의 볼맨 소리와, 왕년에는 소련이 잘 살았고 빵이 남아 돌아서 차고 놀았다는 넋두리가 지겨워 질 무렵, TV에서 디즈니랜드 만화영화가 방영된다. 서방세계에서 배포한 프로그램들이 마구 방영되어, 저녁시간 대에는 조금 농도가 진한
scene이 자주 보이더니, 밤10시쯤 되니 완전히 포르노 왕국같다. 낯 뜨거운 장면을 교포아줌마와
같이 보고 있노라니 좌불안석이다. 러시아가 성(性)에 대해 개방적이라고는 하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정신적인 면에서도 멍들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사할린행 비행기를 타고 한시간 만에 목적지에 다달았다. 유즈노 사할린시크시. 새하얀 눈밭위로 펼쳐지는 풍경, 별세계(別世界). 광활한 벌판을 가로 질러 파이프라인이 지상으로 노출되어 지나가고 있고, 시내 전체는 스키장을 방불케 한다. 장바구를 든 아줌마가 어깨너머로 줄을 매어,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예쁜 아이를 썰매에 태워 끌고가고 있다. 차량통행이 뜸한데, 간혹 지나가는 승용차는 십중팔구 일제 중고차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체제로 바뀐 후, 생산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아수라장이다. 자급자족이 가능한 지역은 그래도 나은 편이지만, 농산물이 별로 없는
사할린 땅에서는 생필품도 부족한 형편이다. 흡사 6.25동란 직후의 한국상황과 같다고나 할까?
백화점이나 상점에 물건이 제대로 없어, 보드카 한병을 사려해도 식당에 가서 사야하고, 자동차
휘발유도 주유소에 가 봐야 아침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며, 그나마 화물차부터 배급을 시작하니, 하는 수 없이 지나가는 화물차에서 웃돈을 주고 산단다.
유즈노 사할린스크시 한인회장 초대로 중앙공원내 식당에서 한식파티가 열렸다. 사오십대 한인
아주머니들이 왁자지껄 입심 좋게 떠들고 있다. 장가 못 간 한국 시골총각들 십여명이 오늘 사할린 교포처녀들과 맞선을 보러 왔단다. 두달 후, 사할린 처녀들이 한국으로 가서 홈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미팅을 한다는데, 한국에 갈 여비가 없어 걱정이라고 하니, 천상 한국총각이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데, 성사가 되는 팀이야 괜찮겠지만, 과연 한 팀이라도 짝을 찾게 될는지 의문이다.
사할린 처녀들이 워낙 활달해서 쑥맥인 한국총각들도 짝찾기 행사 분위기에 쉽게 적응해서 잘 될거라는 얘기인데, 그다지 잘 하는 장사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가 봤던 교포 집에서는 구경하기 조차 힘들었던 흰 쌀밥으로 제왕처럼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선 쌀밥 색깔을 보면 그집의 생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는데, 그래도 한인 교포들은 부지런하여 잘 사는 편이라고 하였다. 한인 아주머니들이 권하는 반주-보드카 원샷(맥주컵)-를 받아 마시다 보니 벌써 다섯 잔째. 목구멍 가득히 화기(火氣)가 넘쳐, 몸 속 깊숙이 파고드는 피로를 큰땅(대륙) 원동(극동)에 온 긴장감과 오기로 버틴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정착되지 않아 모든 경제가 올 스톱이었다. 은행보다 낮은 금리로
관리들이 환율거래를 하는 등, 그나마 풍부한 지하자원도 부패한 관리와 결탁한 외국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갔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나도, 한국 유전개발업자의 손에 끌려 사할린에 와 있지만---.
이 곳에서 번 돈은 당분간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못하고, 이 곳에서 재투자하여야 한다. 유전개발 이익금으로 백화점 옆 광활한 벌판 13만평에, 호텔과 오피스텔 그리고 사할린시에 무상으로 제공되는 문화센터 등 complex center를 건립할 계획이다. 러시아 최초의 민간부문 지명현상 설계가 실시되었고, 나는 그 심사위원으로 이 곳에 온 것이다.
모스크바에서 온 부부 건축가, 타시겐트에서 온 사할린 출신 교포 건축가, 그리고 사할린 거주 3팀 등 모두 5팀의 작품을, 한 작품 당 반나절 씩 사흘에 걸쳐 러시아 교수들과 함께 심사를 했다. 이 행사는 분명 그들에겐 행운이었고 축제였다. Competition에 참여했던 전원이, 심사에 참여하여 자기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할 일이 없다. 한 연구소 당 800명이나 되는 대 설계조직 속에서 일개 부속품으로 활동했던 러시아 건축가들에게는 자본주의 상업건물에 대한 개념분석과 프로그램 해석이 불가능했다. 그들의 생활은 서구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호텔 식당이란 그저 밥 먹고 춤추는 곳일 뿐 창 밖을 내다 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들은 새하얀 눈밭 풍경을 보고 싶지않다. 패쇄된 공간과 정해진 공간규정 속에서 길들여진 그들은, 뛰어난 디자인 솜씨를 가진 테크니션이었지만, 이젠 연구소가 해체되어 자동적으로 소그룹으로 각자 독립할 수 밖에 없었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려도 마땅한 일을 찾기란 그저 하늘의 별따기일 뿐이었다. 외국자본에 빌붙어 사는 사이비 developer들의 하수인으로 전락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공항까지 나와 내 손을 꼭잡고 배웅해 주었던 교포 건축가들의 절박한 모습 속에서 새삼 내 처지를 뒤돌아 보면서, 굶주린 하이에나를 연상케 됨은 왠일일까?
공산주의가 붕괴 하기 전 소련의 주택보급율은 90%를 상회했다고 한다. 하지만, 새 집을 장만하려면 직장조합에서 순번을 기다려야 했는데, 조합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거의 10년 이상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집 규모는 가족수-여자아이 한명 당 방 하나-에 따라 배급하였는데, 이유인 즉 생리현상을
고려해서란다. 큰집 사시는 분은 딸부자인 셈이다. 또한 새 집이나 방 한칸을 구하기가 어려워, 이혼한 부부가 새 짝과 한 집에서 살았고, 더 심한 경우는 한 방에서 동거한 경우도 있다니 야만스럽기
그지없다. 타시겐트에서 온 사할린 출신 교포건축가는 대학을 그곳으로 유학갔는데, 타시겐트는
비교적 물자가 풍부하여 살기는 괜찮으나, 고향에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 싶어도 방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어쩔 도리가 없단다.
사할린 체류 내내 우리를 가이드를 해 주었던 사람. 유난히 수다스럽고 활달한 여자 통역사 - 청회색 눈빛이 강렬하여 나이에 비해 눈가에 주름이 더욱했던 여인-따냐.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그곳 생활이 더 궁핍해져 러시아에서 유태인 핍박이 시작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그녀의 남편은 듬직한 체구를 가진 러시아이었지만, 그녀를 보호해 주기는커녕
호구지책도 해결해 줄 수 없는 힘겨운 동반자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따따"거리는 러시아 특유의 발음과 우수에 젖은 그녀의 눈빛이 익숙해 질 무렵, 최초의 러시아 민간 현상설계는 끝이 났다. 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개최지인 사할린으로부터 거리가 가까운 순서에 따라 등수가 매겨지고 상금이 분배되었다. 현상설계에 관여하고 참여했던 수십명이 모두 모여 저녁부터 밤늦도록 질펀하게 먹고 마신다. 보드카와 맥주, 공항에서나 구할 수 있는 사할린에서 제일
비싼 음료인 콜라, 항아리 속에서 뜨끈뜨끈한 기름과 범벅이 된 살코기 만두, 그나마 우리 입맛에 맞는 국수 등, 식탁 가득히 쌓여 있는 음식 속에서. 음악이 들리고 몸을 흔들 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춤바람이 나는 그들과 함께 춤추면서, 사할린 산(産) 고사리처럼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는 몸을 추스리며 일주일간의 짧은 여정(旅程)을 마감한다.
세시간 남짓 걸리는 가깝고도 먼 이국(異國), 궁핍과 나태 속에 방기(放棄)된 타락의 현장.
그 속에서 또다른 삶을 찾아 방황하는 러시아인들의 고뇌와 번민을 함께 호흡하며,
별천지- 사할린 그 눈밭에 서서, 한번쯤은 체험해 봄직한 인간의 한계상황으로부터 일상(日常)으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여유와 풍요속으로의 화려한 복귀를 꿈꾸며.
선비정신으로 포장된 자아도취, 그리고 유유자적(悠悠自適).
FROM RUSSIA WITH FANTASY.
오늘은 왠지 지나간 기억을 곰씹으며 유행가 한곡을 부르고 싶어라!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러시아 기행단상 - 사할린 그 눈밭에 서서 / 이항배
이 글은 경기고등학교 제66회 동창회보 제7호(1997.06.16)에 일부분 간추려서 기고했던 글의 전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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