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도심,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러쉬아워의 교통체증 현장 속을 헤집고 지나가며 도시 주변의
살풍경한 일상들과 마주친다. 불합리한 신호체계에 따라 지체되는 교통행렬 그리고 날로 실종되어 가는 시민들의 질서의식, 일관성이 없게 표기되어 표지판만 믿고 길을 찾아 가다가는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인 도로안내 표지판, 건물의 형태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혼란스러운 간판들로 뒤덮인 상가 건물 등, 눈에 띠는 것이라고는 못마땅한 것 들 투성이다.
특히 날로 크기가 커져서 꼴불견인 약국 들의 대형간판을 보고 있노라면 울화가 치밀 지경이다. 그 볼썽사납고 큼지막한 글씨들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 국민의
문화수준의 한계를 보는 듯하여 민망스럽기 그지 없다. 또한 너무 많은 간판들이 뒤엉켜 함께 있다
보니, 정작 찾고자 하는 가게 간판은 다른 잡다한 간판들 속에 묻혀 있어 식별하기 조차 어려워서,
본래의 간판 역할도 제대로 못하게 되는 셈이다. 우리 동네에 피부과의원이 있는지 여부 정도는,
매일 지나치는 길이라면 으당 알 수 있어야겠지만, 그많은 간판들 속에서 기억해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까닭에 상가로 책자를 찾아보아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이니 두말할 나위없다.
작금의 건물 고급화 추세에 따라 내외장재료와 설비의 고급화뿐 아니라 건축물의 유지관리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바,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겠고, 간판관리도 예외가 아닌 것은 물론이다. 제 아무리 고급스런 외장재료로 치장된 건물이라도, 자칫 간판관리를 잘못하게 되면
흉물스런 건물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순식간인 것 같다.
요즈음 20여년 된 상가건물의 리모델링 계획을 해보니, 노후한 건물의 외관변경계획은 간판 디자인이 전부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가로형 간판, 세로형 간판, 돌출
간판 등 간판의 종류와 함께, 1개 업소가 표시할 수 있는 간판의 총개수가 3개 이내라는 관련법규도 알게 되었고, 적절한 간판 규제도 중요하지만 그 규제 내용 보다는 간판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더불어 국민들의 문화수준이 같이 향상되어야만, 간판의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예전의 공중화장실에 비해 최근의 휴게소나 공중화장실의 질이 개선되어가고 있는 것은,
올림픽 등 국제적인 행사 개최와 더불어 국민들의 화장실에 대한 인식과 문화 수준이 그만큼 향상된 결과라고 생각된다.
유럽의 자그마한 마을에서 보았음직한 예쁘장한 간판들을,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아 오리라고 기대해 보며-----. 간판의 크기와 갯수로 승부하기 보다는 그 내용과 질을
높여서 보기좋은 간판들을 만든다면, 건물외관을 오히려 돋보이게 할 수 있고, 아름다운 도시환경을 만들어가는 주요한 디자인 요소로서 활용 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간판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도시미관에 대한 작은 배려들이 생활화되고 체질화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약해 본다.
서울건축사신문 "남대문" 칼럼(2002.03) / 이항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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